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KBO 골든글러브/비판 및 논란 (문단 편집) === [[1991년]] === * [[포수]] 부문 || 이름 || 타수 || 타율 || 홈런 || 타점 || 도루 || OPS || WAR || ||[[장채근]] ||345|| .235 || 17 || 48 || 0 || .736 || 2.80 || ||[[이만수]] ||378|| .317 || 17 || 74 || 6 || .914 || 6.08 || '''워낙 옛날 일이어서 크게 주목을 못 받지만, 사실 역대 최악의 수상 논란이 일어날 급이었다.''' 홈런만 동률에 나머지는 거의 비교가 안 되는 성적인데 우승 프리미엄+당해 한국시리즈 MVP 혜택을 업은 장채근이 이만수를 제쳐버렸다. 특히 타율 차이가 엄청난데, 골든글러브가 예나 지금이나 타율 과대평가가 심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째서 저정도 타율 차이를 이길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 워낙 오래 전 일이라 당시 투표 분위기나 팬들의 반응 등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인터넷도 없었고 기자들이 언플용 기사만 잘 쓰면 얼마든지 정당화가 가능하던 시절이라 유야무야 넘어간 듯 하다. 타격 성적만 놓고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결과가 나온 결정적 이유는 당시 이만수가 포수로서의 수비 능력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이버매트릭스가 흔한 상식이 된 2010년대 중후반 이후와는 달리, 이 당시엔 [[포수 리드]]에 대한 환상이 극에 달해 있었고, 어깨는 던질 수록 강해진다는 논리가 당연했으며, 타자들은 삼진을 최악의 불명예로 여기고 컨택을 가장 중요히 생각하며 다운 스윙을 배웠다. 2010년대 이후의 야구관과 비교하기 어렵다.] 1986년에 당한 허리 부상의 여파로 포수 수비력이 급격히 떨어진 이만수는 그 뒤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횟수가 늘었으며, 수비력과 투수 리드 능력에서 낮은 평가를 받던 상황이었다. 1990년에 삼성이 초빙해온 미국인 투수코치 마티는 이만수에 대해 "더이상 포수로 뛰기에는 어려워 보인다"는 평가와 함께 1루수 전환을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91년에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서 수비력이 앞서는 장채근이 주전 자리롤 꿰차고 활약한 것이 크게 작용한 데다가 한국시리즈 MVP 프리미엄까지 있었다. 그래서 골든글러브 투표 전에도 장채근이 이만수를 밀어내고 수상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감지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만수의 타격 성적이 워낙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결국 이만수가 받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꽤 있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결국 장채근의 득표가 많았다. 또한 저 때는 OPS, WAR 같은 스탯은 있는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뭐 어쨌든 당시에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투표 결과인 것은 분명하고, 장채근도 수상 소감에서 "만수 형이 받았어야 하는데.." 라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